Projects
Park Cheonkang Architects

그 성엔 하늘에서 내려오는 숲이 있었어…

‘자연 속의 미술관’이란 타이틀은 언제나 멋지다.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은 이런 ‘자연 속 미술관’이 되고자 한다. 서울과 멀지 않은 거리지만, 꽤 깊은 숲 속이라는 아우라를 풍기고 있는 주변 세팅은 이 목적을 위해서라면 이미 충분히 훌륭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고성(古城)[1]과도 같은 건물의 실내에 들어가는 순간, 외부의 풍요로운 자연은 쉽게 느껴지지 않는다. 램프코어에 난 작은 창들을 통해, 또 각 전시실로 통하는 브릿지에서, 그리고 중정 전시실에서 저 멀리 ‘배경으로서의 자연’은 펼쳐지지만, 시야에 들어오는 주된 풍경은 어디를 가든 발가벗은 모습을 한 옥상의 회색 방수 코팅면이다. 이 상황을 어떻게 역전시켜 볼까?

 

이 건물에서 가장 드라마틱하고 독특한 캐릭터를 가진 공간은 실린더 형태의 램프코어 공간이다. 이곳은 건물 전체에서 유일하게 수직으로 상승하는 공간이다. 이 램프코어 공간을 식재들로 가득 차고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다다익선’[2]의 음각형태로 외부공간을 만들어보자. 다시 한번 사람들이 판테온과도 같이 원형공간 바닥의 가운데 영역을 점유하여 이 공간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게끔 하자. 그러나, 건축내부에 포획되어 아기자기하게 꾸며지고 길들여진 ‘중정으로써의 자연’이 아닌 우리의 기대와 안정성을 빗겨가는 자연을 만들자. 우리가 압도감을 느낄 수 있는, 건축물의 숭고함과 당당히 맞설 수 있는 자연. 우리가 당연한 듯 간단히 재단해버리는 ‘자연스러운 자연’을 넘어선 ‘판타지로서의 자연’. 철저하게 우리의 자연을 바라보는 내적 욕망을 극단까지 상상해보는 ‘잡종 자연’.

 

떠 흘러가는 거대한 야생의 숲이… 이곳에 정박한다. 이 건축에 포획되지 않으려는 ‘자연 덩어리’는 엄밀히 말해 세계수(世界樹)도, 라퓨타도 아니다. 그 둘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한다. 램프코어의 공간은 내부의 수직적 경험을 더욱 충만하게 하기 위해 4m를 높인다. 그리고, 상부의 프레임에서 철재 기둥들이 솟아올라 식재를 담는 (망사와 이끼로 유지되는) 흙을 지지한다. 이 흙 토대는 가운데가 빈 도넛의 형태로 만들어 비, 눈, 빛을 램프공간 바닥면까지 내려오게 한다. 그 위로는 한국의 토종 식물인 소사나무, 느티나무와 각종 관목류를 심고, 흙 아래로는 석송류(club moss), 덩굴장미, 다육식물(succulent plant), 송악류(ivy)를 늘어뜨린다. 이 식물들은 마치 세 겹의 커튼처럼 램프 내부의 텅 빈 공간을 감싼다. 램프는 기존의 콘크리트에서 유리블록으로 교체하고 블록 내부에는 전구색 조명이 들어가 통로를 밝히는 빛이자 식재를 둘러싼 반딧불이 된다.

 

[1] 물론 고성이라는 개념은 소위 ‘자연’과 묘한 방식으로 조우한다. 세계 각지에서 발견되는 ‘고립된 문명’, 혹은 ‘자기-보호장치로서의 건축’이라는 개념-이미지를 지니고 있는 ‘고성’은 자연(이라고 우리가 부르는 것)과 인공-건축(이라고 우리가 부르는 것)이 각자의 욕망을 솔직히 드러내며 병치되고, 주변의 자연과 비교해 건축물의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기에, 어색하지 않게 자연과 어우러지고 있다는 본능적-무의식적 느낌을 준다.

 

[2] 다들 알다시피, 이곳은 현재 고 백남준 선생님의 ‘다다익선’이라는 작품이 공간을 압도하고 있다. 램프를 따라 올라가면서 바라볼 수 있는 계속해서 변하는 이미지로서의 기념비이자 숭고한 탑이다. 공간에 딱 들어맞는 절묘함으로 인해, ‘다다익선’은 지난 24년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의 아이콘으로써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이 건물의 건축가인 김태수 선생님의 초기 설계 의도와도 같이, 이 공간을 다시 아래로부터 꽉 차 올라간 공간이 아닌 비워낸 공간으로 되돌리고자 한다. 죽음을 상징하는 탑의 공간이 아닌 생명으로 가득 찬 공간.

TYPE: 이미지 / 디지털 프린트
YEAR: 2016
STATUS: COMPLETED
LOCATION: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상상의 항해’ 전
CLIENT: 국립현대미술관
DESIGN: 박천강, 구보배 (조경)

Endless Walls

Layer of brick walls…
The walls are like a theatre curtain.
They have windows, doors, and also lush plants.

 

From the front, the wall is divided into two worlds: the brick at the lower part, and the plants at the upper part. Beneath the high skyscrapers of Hongkong shed by daylight, this underworld coexists as strata of thick brick, sewer, catacomb, and shade plants.

 

And the rhythmical windows on the wall dominate the eye level. You can look through the windows of endless walls before you. Through the windows, you see a mixture of many different things. A plant, furniture, skirt, bowl, glass, shirt, people continuously moving, shifting…

 

Each time you pass a wall, you find yourself in another street, another world. The streets vary in width, length and most of all, in atmosphere. Some streets are like an endless meadow, some are like a path between high cliffs where you need to squeeze into, and some are like a maze as in a giant library of Babel.

 

This is the imaginarium where you can see whatever you imagine and buy whatever you want.

TYPE: 인테리어
YEAR: 2017.7. – 2018.5.
LOCATION: 홍콩 몽콕
AREA: 996m2
CLIENT: ㈜에이랜드
DESIGN TEAM: 박천강
STATUS: COMPLETED

Flexibility

FLEXIBILITY: A Reply to Adrian Forty’s
“Word and Buildings: A Vocabulary of Modern Architecture”

 

요나 프리드만(Yona Friedman)과 헤르만 헤르츠베르거(Herman Hertzburger)의 ‘Universal Space’에 대한 비판 논리의 이해:
. Suitable to everyone, to every situation
. Freedom to everyone
. Absolute solution for all problems
. No need for further solutions
. Utopia should be an endless search (always hovering, always a specter)
. It should not fall in to “the absolute”
.Once there is an absolute solution, there is no meaning in architecture, and furthermore in culture.
. It is a cowardly act to fall into the safe “flexibility resolution” (AKA the cure for all the cure. the answer for all the questions. the end of the end.)
. If it is absolute, there is no differentiation between each building.
. Thus it becomes non-differentiated and thus becomes boring.

과연 universal space는 궁극적인 flexible space인가?

 

모더니즘 이후 지난 100년간, 유연함에 대한 가장 흥미로운 시도 중 하나는, 요나 프리드만 (Yona Friedman), 콩스땅 뉘베니 (Constant Nieuwenhuys) 등을 위시한 60년대의 상황주의자들의 ‘유연한 도시’의 아이디어일 것이다. 구조 프레임이 격자로 세워지고, 모든 전기, 설비가 여기에 통합되어 마치 인간의 신체에서 뼈와 혈관을 갖추고, 여기에 장기들과 같은 생활할 수 있는 공간들이 끼워지며, 또 필요에 따라 교체된다는 개념이다. 60년대의 기술적인 진보로 여기까지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데 스틸(De Stijl)의 리트벨트(G. Rietvelt)처럼 칸막이만 갖고 깨작거리는 것이 아니라, 진정 도시적 스케일에서의 유연성을 얘기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개념은 현실적인 문제가 너무나 많았던 것 같다.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면, 내가 살고 있는 A-32의 공중 플롯에서 D-3으로 옮겨가고 싶은데 이미 거기 살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하자. 이 경우, 그 D-3의 입주자에게 일정 부분의 돈을 지불하고 옮겨갈 수 있는데, 그가 기존의 그 자리에 만족해서 옮기고 싶지 않을 수 있고, 혹시라도 우연히 기존의 본인 자리가 지긋지긋해서 집 위치를 옮기는데 흔쾌히 동의한다 하더라도 A-32의 자리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다른 자리를 찾아보아야 할 것인데 이 과정이 또 매우 큰 불편일 수 있다. 또 만족하는 자리를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또 다른 문제는, 만약에 이런 프레임 도시가 세계 곳곳에 산재해있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갈 경우, 자신이 살고 있던 곳과 호환이 될 수 있는가 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미 살고 있는 메가스트럭쳐 프레임 안에서만 이리저리 옮겨갈 수 있다는 것이고, 단지 전망만 달라지고, 동선의 거리만 달라지며, 이웃만 달라지는 것뿐일 것이다 (바로 옆 집의 이웃들과만 안면을 트고 살 경우에). 내 가구들과 소지품을 바리바리 싸들고 이사가는 것과 집 전체를 옮기는 것 사이에서 갈등하기 시작할 것이다. 비용의 문제에 있어서.. 주변의, 혹은 살던 곳에서 먼 곳의 다른 프레임 도시로 이사를 갈 경우에 플롯이 호환이 된다 하더라도 직장의 문제, 자녀 학교의 문제 등이 대두될 것이다. 많은 경우, 이런 메가스트럭처(mega-structure)들은 자체적인 학교와 직장의 플롯을 단일 거대 프레임 안에 모두 포함한다. 이사 갈 필요도 없고 평생 거기서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고 싶을까? 변화라는 우리의 깊은 욕망이 꿈틀대지 않을까? 뭔가 만족스럽지 못하다. 그래서 아키그램(Archigram)의 ‘움직이는 도시(moving city)’가 그 이후에 나왔나 보다. 직장, 학교, 교회, 집이 통째로 이사가는 것이다. 이건 좀 재미있을 수 있겠다.

 

다시 앞의 요나 프리드만의 프레임 도시로 돌아가서 또 하나 생각해볼 것이 있다. 다들 똑같이 생긴 박스에 살고 싶을 것인가? 현재 한국의 아파트처럼? 돈이 없어서 그런 상황에 만족하는 것일까, 돈만 생기면 자신을 더 표현할 수 있는 박스에 살고 싶어할 것인가? 나만의 것, 개성이라는 것은 과연 중요한가, 중요하지 않은가? (개성이란 강박적인 현재적 개념조차도 모더니즘의 동일화하는 힘에 대한 무의식의 반발이 아닐까. 몰개성은 분명 안정감을 주고 다수에 힘에 나를 종속시킴으로 인해 편안함을 느끼는 매저키즘적 메커니즘일 것이다. 다만 이 현대적 개성이란 개념은 매우 오묘해서 다름을 본능적으로 두려워하고 미워하는 인간의 본능을 극복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고, 동일한 베이스가 큰 상태에서 패션과 같이 조금씩의 다름만 인정하고 만족하는 것일 수 있다. 심지어 패션에 있어서도 너무 튀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현대적 개성의 불편한 진실이 아닌가 싶다. 개성을 넘어서는 ‘다름’은 극도로 위험한 모험이다. 다름은 인정하고 좋다고 하지만 너무 달라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동일한 애국심을 갖고 있어야 하고 동일한 선악의 기준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공동체의 통일성과 단합이 와해되어 극도의 공포를 느끼게 된다. 다문화 가정에 대한 공포, 동성애자에 대한 공포, 좌빨/종북에 대한 공포 등) 분명 인류가 진화할수록, 아니면 현재의 정치경제문화 상황에서는, 더 이상 원시시대 혹은 타민족에 대한 무지와 거기에서 비롯된 혼란과 공포의 마진이 점점 적어지는데, 그럴수록 과거의 ‘다름에 대한 공포’라는 본능은 바뀌어야 하는 본능일 수도 있다. 각설하고, 내 집과 타인의 집이 달랐으면 하는 문제는 매우 민감한 문제일 수 있지만, 궁극에는 이 개성에 대한 환상이 증진되는 방향으로 갈 것이고 건축가는 이를 만족시키려 절치부심할 것이다. (마치 아이폰의 커버케이스가 표면적(superficial) 다양성을 축복하는 자본가의 방편인 것처럼..)

 

다양성이 형태로 표현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프리드만은 생각한 것 같다. 즉 시간적인 변화, 유연성의 개념 (그리고 이에 포함된 자유에 대한 갈망)은 공간적인 다양성과 함께 가야 형태 선택의 자유도 극대화된다고 생각한 것이 그 논리가 아니었을까. 그의 공중에 매달린 건물 매스는 같은 형태가 하나도 없다. 매스 스터디스의 베이징 한국관처럼 (과연 한 건물 안에 다양한 형태의 매스가 있는 것은 아이폰 케이스를 다양하게 바꾸고 싶은 욕망과 다를까?) 다양한 한글 형태의 매스들이 하늘을 날고 있다. 이들을 지탱해주는 것은 얇디얇은 구조 프레임뿐이다. 그런데 형태가 다양할수록 교환가능성은 적어진다. 잉여 공간, 버퍼링 공간이 점점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즉, 50~60년대 모더니즘의 효율성과는 상반되는 개념이다. (물론 이제 우리는 효율성의 강박에서 조금씩 벗어나 조르쥬 바타이유의 ‘과잉(excess)’의 유용성에 대해 다시 눈을 뜨고 있긴 하다. 잉여(margin)는 렘 쿨하스가 지적하듯이 유연성(flexibility)의 근본적인 작동방식일 수도 있다. 아른헨의 쾨펠 감옥의 실내배치처럼..)

 

물론 건축에서 교환가능성이라는 것은 프리-패브리케이션 (pre-fabrication)의 의미에서는 (즉 각 회사에서 대량으로 만들어진 창문프레임, 벽돌 규격, 콘크리트 블록 규격, 덕트 규격, 콘크리트 판넬의 규격 등) 얘기할 수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그것이 무엇을 뜻하든 간에) 작품으로서의 건축일수록 더 많은 수작업이 발생한다. 여기서는 유연함에 대한 특수한 경우에서의 교환가능성의 효율성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교환가능하려면 모든 것을 획일화하여 나누는 과정이 필수불가결이다. 이를 가장 효과적으로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그리드이다. 화폐라는 것이 자본주의에서 모든 것을 같은 지평과 기준에서 교환가능하게 만들듯이 3차원의 물질적 현실에서는 그 등가물로 작용하는 것이 그리드이다. 3차원의 그리드. 그런데 어느 시점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그리드를 통한 교환가능성이 다양성을 촉발하게끔도 하는 이상한 현상도 벌어지는 것 같다. 화폐라는 교환가능함이 있기에 다양성이 생산되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철저히 상업적인 논리 하에 말이다. 어쩌면 인류사 그 어느 때보다 더 처절하게. 다르기 위해 다른 것이다. 그것이 어떤 이유에서 그런 것이든 그 근원이 무엇이든 어떠한 상관도 없다. 정당성은 다름 그 자체이다. ‘머드 축제’, ‘고추 축제’, ‘독립영화제’, ‘군인 형들이 서빙하는 조개구이집’, ‘클럽 컨셉의 고기집’, ‘족발을 무지 맴게하는 집’, ‘인디뮤지션들이 공연하는 커피숍’ 등등… 단지 ‘차별화’된 무언가를 생산해내어 획일화에 지친 (전 지구상의 우리 모두가 다 똑같이 생각하게 되어가고 있다는 것에 대한 무의식적인 불안과 공포를 이용해) 우리들에게 어떠한 방식으로든 변화를 주고 그것을 통해 자본이라는 이득을 취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돈을 가지고 또 다른 변화를 찾아 결핍에 대한 욕망을 찾아 끊임없이 떠난다. 아니면 마르크스가 지적했듯 자본은 자본에 대한 욕망을 낳는 끝없는 욕망의 굴레로, 안정성에의, 영생의 욕망으로 치닫는다.

 

렘 쿨하스의 초창기 작품인 ‘Tres Grand Bibliotheque’에서는 형태와 프로그램은 상관이 있을까 없을까? 각각의 프로그램에 맞는 대략적인 형태란 것이 존재할까?

 

여기서는 분명 효율성이라는 개념이 은근슬쩍 드밀고 들어와 프로그램과 형태가 어느 정도 연관이 있다는 논리를 만들어준다. 렘이 세드릭 프라이스와 아키그램이 가르치던 영국 AA스쿨에서의 받은 영향이 드러나고 또 그것을 다른 궤적으로 진화시킨 것이 아닐까 싶다. 교환가능성을 포기한 것일까? 그리고 형태와 프로그램의 잉여에서 유연함을 찾은 걸일까?

 

Text Copyright © 박천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