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s
Park Cheonkang Architects

Cube

큐브는 ‘조화’라는 무용 공연을 위해 김봉수 안무가와 협업하여 만든 무대 장치다.

 

2.1m x 2.1m x 2.1m의 정육면체인 큐브는 1시간 여 지속되는 공연에서 주변 장치이면서 극의 서사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김 안무가는 르 코르뷔제의 마지막 작품인 ‘르 까바농(Le Cabanon-오두막)’이 이번 공연의 이야기의 단초였다고 한다. 삶의 황혼에서  꼬르뷔제는 가장 작은 공간으로 회귀하고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어느 날 바다로 헤엄치러 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까바농은 그 해변에 지어졌었다). 매우 폭넓은 삶와 죽음이라는 주제를 안무와 이 큐브 하나로 다뤄보고 싶다고 했다.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스탠리 큐브릭, 1968)’의 거대한 비석처럼 큐브는 어느 시간과 공간에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던져진다’. 이 큐브는 삶, 관계, 사회, 고통, 즐거움, 물질, 자본 혹은 직설적으로 집-건축으로도 읽힐 수 있는 다층적인 은유를 담는다. 우리가 태어나면서 주어지는 것들. 그 무한한 가능성 그리고 짐. 공연은 이 큐브가 무대의 중앙에 긴 암전 후 강한 조명으로 인해 불현듯 내 눈 앞에 나타나며 시작된다.

 

극이 진행되면서 이 큐브는 점차 분절되고 그 분절된 덩어리들은 가구도 되고 나의 몸의 연장도 되고,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매개도 되고 그저 덩어리도 된다. 그런 진행이 40여 분 정도 펼쳐지며 초기의 웅장했던 큐브는 점차 흐물해지고 사라져간다. 영겁이라고 느껴질만한 시간동안 큐브를 해체하고 그 부분들을 무수히 재조합-결합하고 또 해체하고의 행위를 반복하다보면 어느 순간 그 큐브 가장 은밀한 곳에 내내 숨겨져있던 단단하고 어두운 빛깔의 ‘가장 작은 큐브’가 모습을 보인다. 안무가의 몸이 비집고 뒤틀어 오롯이 혼자 겨우 들어갈 수 있는 크기의 마지막 큐브. 이 곳은 꼬르뷔제의 오두막이고, 방드르니의 동굴(미셸 투르니에,  2014)이고, 김수근의 자궁이고, 우리의 관(coffin)이다.  두려움의 감정과 함께 나의 몸의 모든 거추장스러움과 부가적인 것들은 모두 떨어져내리고 벗거벗고 그 마지막 큐브에 들어간다.

 

다시 암전.

 

 

 

 

 

 

 

 

 

 

 

TYPE: 무대 오브제 디자인
YEAR: 2018
STATUS: COMPLETED
LOCATION: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CLIENT: 안무가 김봉수
AREA: 8m3
DESIGN: 박천강

Jelly Fairy



사진: 최진규

TYPE: 인테리어
YEAR: 2015
STATUS: COMPLETED
LOCATION: 마포구 상수동
CLIENT: 개인 클라이언트
DESIGN: 박천강, 조남일, 최진규

환상의 건축

건축의 힘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았다. ‘건축의 힘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건축의 영향력은 어떤 것인가?, 사회에, 인간에게 어떤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을까? 라는 질문과 다르지 않다. 이 막연한 질문에 답하려는 노력을 하기 전에, 먼저 이 시대 한 젊은 건축가의 이야기에 잠시 귀기울여보자.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건축이 제공할 수 있는 삶의 풍요로움과 행복을 믿는다. 또 한 이 즐거움을 전하는 전도사의 역할이 건축가의 몫이고, 건축의 힘이라 굳게 확신한다. 대중이 아직 그 즐거움을 몰라서 그렇지 (건축가가 느낀 만큼) 알게 되면 그들이 더 행복할 수 있을 거라고… 그걸 통해 나도 좋은 건축물을 더 지을 수 있는 여지가 생길 거라고… 비록 지금은 힘겹게 건축사무소를 운영하고 있지만, 이런 작업들을 착실하고 겸손하게 하나둘씩 해나가면 그 노력들을 알아주는 시기가 오고(유명세 또는 자본으로 전환이 되고), 또 세상이 더 좋아지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믿음에 기대 오늘도 나를 비롯한 수많은 건축가들이 밤을 지새운다.

 

이런 내가 아침에 일어나면 매일같이 하는 일이 있다. 스마트 폰에 이메일로 전송된 이 주의 건축이라는 웹진 뉴스레터를 보는 일이다. 작은 네모 창을 통해 어떤 건축과 건축계 이슈들이 새로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파악한다. 아마도 이런 강박적 반복은, 첨단 유행을 익혀야한다는 의무감, 그리고 나도 모르게 피어오르는 건축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에서 기인한 걸 꺼다. 그러나 이 짓도 오랜 기간 반복되다 보니, 아이러니하게도 그 어떤 새로운 작업도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게 되는 순간을 마주하게 된다. 이 때 느껴지는 감정은 불감증이다.

 

SANAA 50%, OMA 20%, 헤르족 앤 드뮈론 20%, 나만의 비법 10%, 혹은 자하 하디드 40%, 그렉 린 30%, 헤르난 디아즈 알론조 10%, UN Studio 10%, 남들이 모르는 소스 10%… 취향 역시 데이터베이스화 되고 참조적 전유는 공공연하다. 그 언어는 항상 모두가 인정하고 좋아할 수 있는 현대적인 것들 중 고른다… 컨텍스트의 고유함과 건축주의 개성, 그리고 대중을 위한 선량함의 코스프레까지 더한다면 금상첨화다…

 

끊임없이 돌고 도는 유행의 순환 뿐, 현재 우리가 처한 건축적 상황에 대한 담론도, 독한 솔직함도, 냉철한 분석도 없어 보인다. 반복되는 살아남기의 경쟁에 좌절하고 지쳐서인지, 대응을 할 힘도 의욕도 점차 사라지는 것 같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비단 한국에서 건축을 하는 나뿐만이 아니라, 현재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전 세계 건축인의 공통적 특성으로까지 느껴지곤 한다. 이 모습은 자본주의가 끝없이 강요하는 ‘새로움’과 ‘독특함’에 부응하기 지친 세대의 적나라한 맨 얼굴이 아닐까? 왜 중요한지도 모르는 채, 새로움은 내 강박이 되었다. 또한 이 쳇바퀴처럼 영원 회귀하는 가상의 강박은 결국에는 나를 이 불감증의 감옥으로 인도했다.

 

꽤 최근까지 블록버스터 급 영화들의 후속편에서 반드시 등장하곤 했던 진부한 수사들인 ‘더 커진’, ‘더 화려해진’, ‘더 강력해진’ 등은 어느 순간에서부턴가 영화판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드래곤볼에서처럼 계속해서 어디선가 나오는 더 강한 상대는 슬라보예 지젝이 분석한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감각의 제국(1976)’에서처럼 더 이상의 잉여쾌락을 남기지 않는 욕망의 죽음만이 그 종착점이다. 그 끝은 무감각이고 더 나아가서는, 내 손에 쥐어진 고깃덩어리로서의 ‘남근’, 마주치기 싫은 적나라한 실재와의 대면일 것이다. 지금 그 무기력의 시대가 도래했다. 제길… 모두들 엿 같은 실재의 사막에 온 걸 환영한다.

tags: Writings

『건축의 힘은 무엇인가 』, 건축평단 vol 5. 2016 봄, 정예씨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