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s
Park Cheonkang Architects

찰나의 지속 — 나를 잊지 말아요.

1. 이제. 한국은 좋은 공공공간을 원한다!

 

현재 한국에서는 공공공간 혹은 도시 내 유휴공간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에 대해 많은 논의가 오가기 시작한다. 동네 건축, 골목길, 도시 거실, 자투리 공간의 활용, 도심공원 등 다양한 개념들이 나오고 있으며, 이런 사실은 그만큼, 자본의 논리에만 의존하지 않은 좋은 도시 공간을 만들고자 하는 건축가들과 시민들의 욕망이 얼마나 큰 지를 증명한다.

 

이런 논의의 연장선 상에 ‘파빌리온’에 대한 재인식과 의지도 있다. 파빌리온은 놀거나 쉬기 위하여 지은 ‘집’을 의미하고, 대개 벽 없이 기둥과 지붕만 있는 구조를 가지며, 사람들이 햇빛과 비를 피해 쉴 수 있는 공간이다. 이제 이 ‘파빌리온’이란 건축 형태는 모든 사람이 차별 없이 어울릴 수 있는 ‘환대의 공간’이 되고 있다. 좋은 공공의 도시를 만들기 위해, 남는 공간에 지극히 건축적인 매체인 재료와 형태, 크기를 사용해 어떤 모습으로 대중에게 다가갈 것인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마당에 제안될 공간을 통해 예술과 공공의 관계에 대해서 진지한 고민을 할 수 있길 기대해 본다. 예술공간과 공공이 만나는 도시의 마당에서 행위의 건축, 이미지의 건축, 모두의 기억을 위한 건축을 꿈꿔본다.

2. 전환점을 맞이하는 예술과 공공의 관계, 그 가능성을 파빌리온에게 묻다.

 

21세기. 무수히 많은 파빌리온이 지어지고 있다.

 

전지구화로 인해 인류는 제 분야에서 다양성이 점차 사라지며 동질화되는 상황에 처해있다. 모든 것이 하나의 방식으로 일률화되는 이 시대에, 인공적이고 의식적인 다양성을 만들기 위한 피나는 노력이 ‘포스트모더니즘’이란 기치아래 시작되었고, 지금까지 그 깃대는 마냥 높아져만 왔다. 모든 국가와 도시가 관광도시, 문화도시, 제 2의 빌바오를 부르짖으며, 여기서 창출되는 금전적 이윤을 응시하며 ‘독창적’이고 ‘창조적’인 축제와 건축물을 무차별적으로 지은 지 어언 20여년.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발맞춰 디자인과 예술이 가장 발 빠르게 치고 나갔고, 여기에 ‘건축’도 그 무거운 몸집을 뒤뚱거리며 지각생으로 동참하게 되었다. 그 태생적인 육중함과 느림에도 불구하고, 건축은 끊임없이 ‘새롭고’, ‘다양한’, ‘the next hot thing’의 이미지를 요구하는 대중과 학계의 욕망에 부응하려, 조명, LED화면, 곡선적 형태와 착시, 반사 스텐레스, 다이나믹 파사드 등 반영구적인 건축에 영속적인 변화의 이미지를 주기 위한 힘겨운 진화를 계속하였다.

 

이런 ‘표면(surface)을 통해 가상의 이미지를 만드는 방식’의 반대쪽 스펙트럼의 끝에 ‘파빌리온’이 고요하지만 묵직하게 위치해있다. 파빌리온은 일반적인 건축물에 비해 규모가 작아 쉽게 지을 수도 부술 수도 있는 특별함을 갖추고 있다. 즉 빠른 시간 안에 짓고 제거함으로써, 건축의 이미지를 끊임없이 쇄신하는 가장 직설적이고 과감한 방식이다. 조르쥬 바타이유가 언급하는 과잉과 소모의 포틀레치에 다름 아니다. 축제와 정확히 동일한 다이어그램을 갖춘 이 잉여행위가 자본주의 그리고 전지구화의 틀 안에서는 만국박람회와 같은 형태를 되풀이해왔다. 또 다른 ‘다름’을 생산하기 위한, 또는 아카데미아라는 좁은 틀 안에서의 자족을 위해 존재했던 파빌리온만이 다가 아니다. 분명 더 가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3. 파빌리온은 어떻게 더 진화할 수 있는가?

 

파빌리온은 더 좋아질 수 있고, 앞으로 더욱 풍성해질 수 있는 건축 타이폴로지이다. 우선, 비록 간단히 만들고 부술 수 있는 소모품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파빌리온의 태생적인 한계 이상의 강한 여운이 남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 다른 독특함’, ‘첨단 건축기술’, ‘선진 건축 이론’과 ‘형태의 전시장’, ‘학계에서만 칭송하는 그들만의 리그’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미학적인 관점, 문화적인 컨텍스트, 즉 파빌리온이 위치한 장소와 국가의 물리적, 문화적 형태뿐 아니라, 원 기억, 혹은 칼 융이 말하는 집단무의식을 이용할 경우, 더 이상 글로벌리즘이니 로컬리즘이니 하는 오래된 논의들을 건너뛸 수 있다. 이제 좀 더 직감적이고 본능적으로 가자. 이는 형태, 재료의 사용 혹은 주변 매스, 텍스쳐와의 관계에서도 스멀스멀 나올 수 있다. 이를 통해 철저한 이미지로써의 건축이 가능한 틈이 열리는 것이고, 이 건축은 20세기 후반부터 현재까지 우리 건축계를 지배해온 ‘스펙타클의 건축’, ‘아이코닉 건축’의 이미지 사용법과는 다른 방식으로의 전개를 가능케 한다. 더 이상 무의미한 기의와 기표의 놀이를 끝내고, 우리의 DNA에 각인된 원형을 이용하자. 나무와 숲, 바다를 보면서 느끼는, 혹은 사랑을 하면서 느끼는 본능적인 쾌감들을 의식하며 이를 건축에 압축하자. 베르나르 츄미가 사용한 산업시대(industrial era)의 구축적 상징의 유산 그리고 빨간색만이 가능한 것이 아니라, 무수한 형태와 이미지들을 무한히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자. 의식의 차원을 넘어 무의식의 영역에서 더 강렬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이라면 더더욱 좋다. 지나가던 꼬마도, 이승기에게 흠뻑 빠진 일본 아줌마도, 80세 흑인 할배도 본능적으로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게끔 하자. 우리는 이번 파빌리온에서 그 가능성을 찾아보자. 판타지를 자극할 수 있고, 찰나의 시간이나마 초월/트랜스의 세계에 진입하고, 환각에 빠져 극도의 몰입을 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된 것이다. 마치 매트릭스의 사이퍼와 네오를 조금씩 섞어놓은 듯 말이다…

1. Now, Korea Wants a Good Public Space!

 

Recently, in Korea discussions on how to make use of a public space or urban residual space are starting to burst out. Ideas like ‘Neighborhood Architecture’, ‘Alleyways’, ‘Urban Living Room’, ‘Making Use of Leftover Spaces’, ‘Urban Park’ etc. are emerging and this reflects the fact that the desire of architects and people of Korea to make a good urban space-that is not solely based on the logic of capitalism-is huge.

 

On the extension of this discussion, there is a reconsideration and will for evolution of this pavilion typology. Pavilion means a small scale spatial structure for play or rest with only columns and roof mostly. Here, people can also hide from the sunlight and rain. Now this architectural form has become a space where everyone is invited and all can mingle together without direct purpose. In order to make a good public city, the question is here. How can we approach the public by using exclusively architectural media such as material, shape and scale in the open space in the city?

 

Through the space that we will propose to the MMCA courtyard, we hope to intensively reconsider the relationship between art and the public. In this urban courtyard where the art space and the public space meet, we dream that there can be architecture of act, architecture of image, for memory, architecture for all.

2. The Scenery of the Pavilion

 

21st century. Multitudinous pavilions are being built.

 

By globalization, in every field mankind has been losing diversity and everything is becoming homogenized. In an era that all things are becoming uniform in one way, the long journey for an artificial and conscious ‘diversity’ has started with the banner of Postmodernism and that banner is ever higher than before. For the last 20 years, with profit in mind, every nation and city is crying for a tourist city, cultural city, the second Bilbao, and festivals and architecture has been thoughtlessly built in the name of ‘unique’ and ‘creative’. The field of design and art has promptly responded to these needs of the times, and architecture too, as a late comer, has joined the parade. In spite of the natural born heaviness and slowness, architecture, in order to correspond to the people and academia’s constant requirement for the image of an extremely ‘new’, ‘diverse’ next big thing, has continued an arduous evolution to give the semipermanent building a permanent change of face-using ‘lightings’, LED screen, curvilinear form and illusions, reflective stainless steel, dynamic façade etc.

 

At the other end of this spectrum of evolution, of these “surface” treatment to create a virtual image, sits the pavilion calm but weightily. Pavilion is special in that it can be easily built and easily disassembled because of its humble scale. It is the most direct and drastic method of eternally changing the image of architecture by literally continuously building and destroying it. It is all about what Georges Bataille called Potlatch, the ritual of excess and consume. But now that reincarnates in the shape of the world fair within the system of capitalism and globalization. The purpose of making pavilion which existed so far in order to create ‘difference’ or ‘newness’ for the academia, can be directed into a more meaningful and rich way.

3. More and More Evolution of the Pavilion

 

Pavilion is an architectural typology that can be better and richer. Even expendable as being built and destroyed easily, it should have a strong lingering imagery. It should not become another league of their own, another exhibition of uniqueness, high-end technology, advanced architectural theories and forms from abroad. Not only the physical and cultural context of each country but we should use the power of the ‘Deep Memory’ or what Karl Jung calls ‘Collective Unconsciousness’, and then we need not argue on the long-lived issue of globalism vs. localism. Let us be more intuitive and instinctive. This comes from the shape, material and relationship with the adjacent mass, texture. By this, the cleavage leading to a vigorous architecture of image may open up, and this can be different from the way how ‘Spectacle Architecture’, ‘Iconic Architecture’ used images since the late 20th century. Let us end the meaningless play of the signifier and the signified, and use our collective unconsciousness carved into our DNA. Let us condense our basic pleasures when we feel love, when we see the tree, forest and the sea, into architecture. We have to acknowledge that the images can be so rich, and more than the trace of the constructivist’s formal image and red color. The more it is intuitively understandable, the better. It would be great if the kid walking by, a mid-aged Japanese woman who loves Winter Sonata, 80 year old African American Grandpa can all instinctively appreciate and love. We should find that possibility in this pavilion. If this can stimulate our specific fantasy, and if it can lead us into the trance and immersion, it may be enough. Like the secret alchemy combining Cypher and N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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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Copyright © 박천강

낡은 것, 시간을 머금은
사물들에 대한 현대인의 욕망

요즘 한국에서 소위 핫하다는 바 혹은 카페들이 가진 공통분모가 있다.

 

70~80년대에 대량생산된 박스형태의 효율적 건물들이 낮은 석면 천장 그리고 인공적 재료임이 눈에 띄던 벽지를 뜯어제끼기 시작하고, 기존 건물의 구조와 설비, 전기 시설이 그대로 노출된 콘크리트 천장과 막 바른 시멘트 벽, 바닥이 어느 순간부터 많은 공간들의 핫함을 대표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공간은 이전과 다른 몇 가지 큰 장점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천장이 높아진다는 것. 간단한 것 같으면서도 무시할 수 없는 장점이다. 높은 천장이라는 것은 각 층의 난방/냉방이나 조명의 전기 비용, 건축주의 자본으로 환산되는 최대한의 효율에는 부담되는 것이었다. 철저히 건축주 혹은 세입자의 자본 회수율에 의거한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그러나 거칠게 보아서는 우리가 효율이라는 자본주의의 무시할 수 없는 굴레로부터 후기자본주의의 다양성(Multiplicity)과 과잉, 넘침 (Excess)라는 다음의 단계로 나아가는 과정이 이러한 경향의 물꼬를 크게 틀어놓았다 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는 사람들에게 다름이라는 것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둘째는 기존 건물에 대한 재발견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그러나 그다지 자랑스러울 것은 없는) 시간을 머금은 건축적 유산들이 경제적, 문화적 요구에 의하여 그 옷을 바꿔 입는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한국인에게 세대갈등은 있어도 문화적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는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즉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희미하거나 또는 지난 백 년간 이것이 지워지는 과정을 겪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지난 60년간 우리의 역사는 끊임없이 새로워야 한다는 내적 요구에 의해 세계의 여타 다른 문화 / 정치 / 경제 방식을 받아들이는 것에 한없이 관대했으며 열광해왔고, 또한 유행이라는 것은 무한히 긍정할만한 것이고, 이를 즐기는 방식으로 발전해왔다고 본다. 이는 우리가 지켜야 할 것, 보존하고자 하는 욕구는 그리 많지 않았다는 것의 반증일 수 있다. 이는 분명 우리에게는 축복이라 본다. 국민들은 이러한 자부심을 어디에서든 찾을 준비가 되어있다.

 

이런 유행은 한편으로는 20~30년 밖에 안된 우리의 짧은 현대 건축 역사에게서 마치 어머니의 젖가슴의 체취를 느끼고 싶어하는 성인과 같이 시간이 담긴 공간을 향유하고자 하는 현 세대의 욕망의 발현일 수도 있다. 이러한 원초적인 것과 시간이 담긴 것에 대한 동경과 함께 마치 뉴욕 브룩클린 혹은 파리의 아니면 폐허 또는 버려진 공간에 대한 취향을 통해 원초적이고 신비로운 공간을 향유하고자 하는 열망인가? 후자의 경우에는 특히 갑자기 옛 유럽의 밀교의 장소가 되었던 고대성의 지하 혹은 카타쿰 등이 연상된다.

 

재료라는 것은 항상 매우 신비한 힘을 발휘하는 듯하다. 그 표면의 매끄러움 혹은 거칢, 표면의 반사, 그 미묘한 각양각색의 색깔들, 텍토닉한 패턴들 모두 표면적인 것 이상의 감응을 우리에게 불러일으킨다. 이는 특정한 형태의 공간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아득한 집단무의식의 기억 저편에 새겨진 무언가를 떠올리게 하는 기묘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무엇이 됐든 간에 그 특유의 감성이 낡은 건물의 실내의 껍질을 벗겨냄으로써 ‘쌩얼’ 상태의 거칢에 열광하게 되었다는 것은 맞는 것 같다.

 

요즘의 실내공간에서 유행처럼 번지는 이와 같은 ‘꾸밈없음’과 ‘릴렉스’ = ‘핫함’이라는 공식은 예전 안도 다다오를 기점으로 하여 일본에서 그리고 이에 영향을 받은 한국에서 유행하던 건축에 있어서 1990년대의 노출콘크리트에 대한 선호 현상과 교차점이 있을까?

 

한국 건축계에서 노출콘크리트에 대한 지금의 선호는 어디서부터 기인할까?

tag: Writings

안데르센의 책장













안데르센은 동화책이라는 매체를 통해 인류의 마음에 자리잡았다. 안데르센이 만든 세계의 구체적 형태의 모방보다는 전세계에 퍼져있는 안데르센의 수많은 사본을 읽을 수 있는 ‘정원 안의 도서관(Library in the Garden)’을 제안한다. 이 안에서는 문, 창문, 벽 등의 건축요소와 나무, 관목 등 조경요소가 다양한 스케일을 가지며, 어떤 곳에서는 모든 것이 커져 어른이 아이로 돌아간 것 같은 감정도, 또 다른 곳에서는 모든 것이 작아져 아이들도 마치 어른이 된 것 같은 감정도 느낄 수 있다. 이 곳은 조경과 건축이 엉켜있는 채로 있는 안데르센의 ‘어쩌면 있을 법한’ 세계이다. (각각의 상상을 통해 같은 조경도 특정 안데르센과 언제든 연결될 수 있다. 여기서 디자인의 관건은 특정 조경과 건축이 그 상상력의 통로로 여행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여주는 일이다.). 여러 개의 다른 세계는 가운데의 (놓칠 수 없는) 짧은 길을 통해 모두 쉽게 연결되며, 이 밖에 각 세계는 또한 곳곳에 숨어있는 비밀 문을 통해 이어진다. 각 문들은 신비로움과 놀라움(이는 스케일의 차이와 조경의 차이를 통해 조작된다)의 통로가 된다. 벽의 창문들은 각각 다른 세계를 엿볼 수 있는 동시에 다른 세계로 갈 수 있도록 유혹한다.

TYPE: 박물관
YEAR: 2013
STATUS: NOT COMPLETED
LOCATION: 오덴세, 덴마크
CLIENT: 오덴세 시
DESIGN: 박천강, 최진규, 최장원, 구보배(조경), 김성희(조경)